출처: http://www.ppomppu.co.kr/zboard/view.php?id=issue&no=105109


오랫만에 쓰는 글이 전 대통령의 여성편력과 같은 사생활에 관한 글이어서 쓰기가 민망합니다만, 아래 블랙코메디 장르 영화의 장르적 특성에 따라 있었던 과장으로 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이의제기를 하시는 분이 계셔서 조금만 적어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래 글을 적으신 아작 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혹은 정정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글을 썼다고 하면 제목부터 수정하고 댓글을 다는 자세부터 다르게 하셨으면 하는 심심한 충고도 드려봅니다. 아무리 정당한 이의제기라도 그것을 담을 품격이 느껴지지 않으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법입니다. 하물며...... 이 이상의 말은 혹여 마음 상하실 수 있으니 여기까지 합시다.



1. 박정희의 조강지처, 김호남

나이 열 일곱에 박정희에게 시집을 왔던 분입니다. 박정희의 조강지처는 원래 육영수가 아니라 이분이었죠. 이 당시 시대에 혼인이 집안의 강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키도 박정희보다 크고, 얼굴이 밉상이거나 못난 구석이 있는 여성은 아니었지만, 강권에 의해 이루어진 결혼이라 사랑이 없었던 것. 그리고 박정희 본인이 김호남의 집안과 학력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박정희는 집을 나가게 되고, 시댁에 김호남을 내버려둔채로 문경에서 선생님으로 재직하게 됩니다. 김호남과의 사이에서 당시 박재옥이라는 장녀가 태어났는데도 집에 10원 한푼 보내지 않고, 미혼인 것 처럼 행동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랑없는 이 둘의 관계는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었겠지요. 결국 일본군에 입대해 귀국 군인이 된 상태에서 김호남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그녀는 들어주지 않고, 박정희는 부임지를 떠돌게 됩니다.


2. 박정희의 동거녀, 이현란

이때 부하의 결혼식에서 이화여대생 여현란을 만나게 됩니다. 김호남과는 다르게 둘은 사랑하는 사이었고, 동거를 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 이루어진 동거로 인해 박정희는 골치가 아프게 되지요. 이현란, 김호남에게 할 짓이 아니었던 것. 이혼을 요구해도 이루어지지 않자 박정희는 술로 그 마음을 달래곤 합니다. 물론 이현란이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집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고, 8살 아래인 이현란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했을 정도로 둘 사이는 깊었다고 합니다.

이 둘의 사이가 갈라지게 된 것은 박정희가 여순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것부터 였습니다. 당시 박정희가 결혼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이현란은 박정희가 갑자기 실종되자 둘 사이에 다리를 놓았던 부하 이효에게 그 안부를 묻습니다만 묵묵부답. 결국 여순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것을 알게 됩니다. 이현란은 공산주의가 싫어 이북에서 피난을 온 사람이었고, 두 가지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결별하게 되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빨갱이라니! 게다가 결혼하고 딸까지 있는 유부남이었다니!

박정희는 얼마 뒤 동료들을 밀고한 댓가로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둘 사이는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이로 인해 박정희는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지요.


3. 퍼스트 레이디, 육영수

이현란과 헤어진 박정희는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군에 복귀합니다. 전쟁 중 대구사범대 학교 후배 송재천이 찾아오지요. 송재천은 박정희에 대한 동경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송재천을 통해 소개받은 여자가 육영수 입니다. 먼 친척 뻘 되는 사람이었죠. 이 둘은 맞선을 보게 되는데, 이 자리에 박정희는 술이 취해 도착하게 됩니다. 육영수의 아버지는 육종관이라는 인물로 이 역시 여성편력이 심한 사람이었지요. 부인이 대여섯, 자식은 스무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육영수는 정실 소생이었고, 바랑둥이가 더 보수적이라고, 자기 딸 자식에 대한 태도는 다를 수 밖에 없었지요. 박정희를 좋게 보지 않은 그는 반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육영수는 그를 마음에 들어했고, 육영수의 모친은 박정희가 결혼한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 사실을 남편에게 숨긴 채 결혼을 추진합니다. 이유는 재미있게도 점쟁이의 말, "육영수는 한번 결혼한 사람과 재혼해야 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낯 점쟁이말에 퍼스트 레이디까지 된 상황, 아이러니하지요? 어쨋든 이 둘은 전쟁 중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호남에게는 결국 이혼 도장을 받아내고 말이죠.

이후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하게 되고, 이후의 여성 편력은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누가 한 나라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 독재자의 여성편력을 감히 떠들겠는가? 라는 의문에 맞추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러다가 박정희 사후부터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슬슬 엽색 행각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군사재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채홍사 역할을 한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의 증언으로 인해 그러한 소문들이 사실이었음이 밝혀지지지요.

사실 이전 부분이 단순히 사생활의 측면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관용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후에 권력자가 된 뒤의 권력을 위시한 이를테면 강압, 위력의 관계라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기에 이후의 부분은 여전히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부분이지요. 사실 가장 유명한 것이 숨진 당일 모 유명가수와 모델 출신 여대생과 함께 배석하여 출시중을 받았다는 이야기였으니, 그에 대한 증언부분을 좀 더 자세히 들어보도록 하지요.


4.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의 증언.

박정희는 여자와 단둘이 하는 소행사와 남녀 서넛과 함께하는 대행사를 가졌는데, 한달 평균 소행사는 8번, 대행사는 2번 정도 가졌다고 합니다. 대충 사흘에 한번은 주색을 탐했다는 것이지요. 대행사의 경우 박정희와 그 측근 손님들, 그리고 여성 두 어명 정도가 함께 했는데, 박정희가 술이 좀 되어 취기가 돌면 자연스럽게 한 여인에게 기대게 되고, 그것이 간택받는 행위였다고 합니다. 어휴.. 10.26 당시에도 심수봉과 신재순(한양대 연극영화과) 두 명이 시중을 들었다고 하더군요. 어쨋든 이러한 소행사나 대행사에서 간택을 받은 여인들은 한 번 이상 받정희를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박정희가 한 여인에게 빠지거나, 임신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하네요.

법정에서 박선호는 이러한 여인들의 리스트가 약 200명 정도되며, 알려지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이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만, 구체적 이름들은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김재규가 이 리스트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말 것을 말했으며, 군 법무관들도 사건과 관계없는 증언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간에는 이러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엽색을 육영수 여사의 사망 이후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행색이라고 하여 동정하기도 하지만, 사실 박정희의 이런 여성편력은 육영수 여사 생전에도 마찮가지 였으며, 육영수 여사 사후에 더 깊어진 것 정도로 인정되곤 합니다.


5. 밤마실 사건들. H아파트 사건, 국군 강호장교 추문사건, 새마을어머니 배구대회 추문사건 등의 소문들.

생전 육영수 여사는 당연히 이런 행위를 좋아하지 않았고, 청와대 사정 담당 홍종철에게 의뢰하여 경호실장 박종규의 낙마를 주도하지만, 박종규는 자신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홍종철을 찾아가 총으로 쏴버립니다. 물론 맞지는 않지만 이에 질려버린 홍종철이 더 이상 일을 주도하지 않게 되지요.

어쨋든 이 박종규가 육영수 여사 사망으로 인해 물러나기 전까지, 그리고 안가를 만들기 전까지 박정희는 승용차로 밤마실을 나서곤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H아파트 사건입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사는 아파트로 직접 만나로 간 박정희가 한 아주머니와 마주치게 되고, "어머, 대통령 각하 아니세요?" 이 한마디에 끌려나와 입단속까지 당하게 되지만, 소문은 퍼지게 되었지요. 이게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하기 힘든 것이 나중에 이 아주머니가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단순히 뜬 소문으로 치부하기에는 좀 케이스가 많았지요. 국군 강호장교 추문사건의 경우, 건강검진을 도운 여성장교를 맘에 들어한 박정희가 이 여성장교를 임신시키고, 이 여성이 잠적하자 찾기 위해 고생을 했다는 소문. 이것 역시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하기에는 당시 김재규의 변호사였던 안동일이 자서전에서 "여군 장교 이야기는 사실이다." 라고 짧막하게 밝히고 있고,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여군 장교들이 안가에서 술시중을 들었다." 고 밝힌 것을 보면 쉽지 않으리라 봅니다.

새마을어머니 배구대회 추문사건의 경우에도 소문으로 전해지는데, 이 부분은 해당 여성이 유부녀였고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구체적 증언은 나오지 않았고, 따라서 소문으로 치부하는 곤 합니다. 이외에도 위 안동일 변호사를 통하여 나온 연예인을 더불어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더 이상의 이야기가 필요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6. 마치며 

위에 언급된 것들 중에서 많은 부분은 기록 뿐 아니라 소문에 근거한 것들도 많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독재자의 일이니, 사후 얼마나 이렇게 왈가왈부 하는 것이 재미있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보면 분명히 저 중에는 (제가 언급한 것 이외의 부분도 많습니다.) 분명히 뜬 소문도 존재할 것 입니다. 또한 사생활의 부분, 특히나 권력자의 사생활 부분을 적나라하게 밝히는 것에는 부담감이 있기도 하며,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기에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문서로 전하지는 않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여성편력이 심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많은 증거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적어도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며 독재자였음을 차치하고, 공과 과를 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제대로 알고 옹호하거나 비판해야 겠지요. 위의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은 <정치과외 제1교시>라는 이동형 작가의 책을 비롯하여, 당시의 인터뷰를 찾아본 뒤에 썼습니다.

분명히 이 글에는 과장된 부분도 존재할 것이고, 개인의 사생활을 써내려간다는 것, 거기에 여성편력이라는 부분을 언급하는 것이 낯뜨겁긴 하지만, 영화의 과장된 부분을 들어, 많은 사람들이 그 부분에 대한 언급조차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영화가 아닌 실제의 증언이나 기사를 접한 것으로 판단함에도 불구하고 이정토 다수를 무지한 것으로 몰아가며, 그 외의 박정희 대통령이 여성에게 젠틀했다거나, 같이 배석했던 여인 한 두명의 이야기를 통해 옹호하려는 문제제기에 정당성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 몇 자 적어내려봤습니다. 사실 개인의 사생활을 논하는 것보다는 그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더 맞겠지요.

분명히 박정희 대통령은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은 맞습니다만, 그에 대해서 우리가 수용할 부분이 있고, 수용하지 않아야 할 부분이 있음을 밝히며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발 부탁이건데, 큰 틀로는 비슷하게 여길 수 있을지 모르더라도 각기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으로 개량할 수 없는 이정토가 어떠하다는 자의적 판단과 재단을 거친 뒤에 쓰는 글은 동의를 받을 수 없음을 직시하셨으면 합니다.

게다가 그러한 어조의 글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비판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진리와 사실을 설파하러 왔노라. 무지한 자들이여!" 라던가 "싸우자! 빨갱이들아!" 등의 자신이 선각자라 피력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비공감을 넘어선 비호감을 일으키는 글 좀 써내리지 마세요. 자신의 인격이 풍화되어 나가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됩니다. 여기에 참여하거나 읽어 내려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지식이나 지혜없이 함부로 읽고 적어내려가는 사람 없습니다. 같은 내용을 알리려는 글이라도 어조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 질 수 있음을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분명 억울한 경우도 있을 수 있겠으나 간혹 다른의견을 많이 받는 분들은 자신의 그러한 주장의 다름 때문이 아니라 내용과 전개의 틀림 때문이며, 그와중에 글의 어조 또한 한 몫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자문해보셨으면 합니다.

요즘 유독 이정토에 이러한 글들이 종종 보이는 터라 바쁜 와중에 빠르게 적어내려가 봤습니다. 이 글을 적게 하신 아작 님께는 글을 써내려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신 부분에 감사드리며, 혹여 제 글에서 기분 상하셨을 부분에 대해서도 미리 사과합니다. 그리고 이후 피드백이 있으실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정정할 부분이 있다면 확실한 자료 첨부하셔서 주장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시민의 당연한 소양인 비판의식에 대해서 요즘 젊은 것들은 겪어보지도 않고서 비판을 한다고 외치는 일부의 분들에게 바치는 전우용 님의 트위터 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좋은 하루되시길! 


전우용:

1. 일제강점기 조선인 순사 중에는 일본인들에게 차별받으면서 마음속에 ‘반일의식’을 품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진짜 ‘친일파’가 된 건, 오히려 해방 이후 ‘왜놈 앞잡이’로 찍힌 뒤였죠.. “먹고 살려고 한 일이 왜 잘못이냐?”는 반감 때문에.

2. 요즘 노인들에게서도 간혹 그 시절 순사들의 마음을 봅니다. 박정희, 전두환을 부정하는 ‘젊은 것’들을 보면서, 그 시절에 그냥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정부 시책에 협조했을 뿐인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갖는 것 같더군요.

3. "박정희 덕에 나라가 발전했다"는 생각 곁에는 "내가 그 시대의 협력자이자 주역이었다"는 생각이 있을 겁니다. ‘소극적 협력자’였던 사람이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적극적 동조자’였던 걸로 기억을 조작하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4. 스스로 조작한 기억을 깨고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욕망이 강한 노인들은 더 할 겁니다.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는 젊은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Posted by kkot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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